이제는 바다라 부를 수 없는 곳
할 일은 쌓여만 가고, 마감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정작 바빠야 할 손과 머리는 과부하에 더 이상 움직이기를 멈춘다. 속절없이 돌아가는 시계 초침 소리에, 머릿속엔 한바탕 거대한 상념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마감 기한을 넘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눈앞에 놓인 걱정에서 시작해 당장 해결할 수도 없는 깊은 고민까지 밑도 끝도 없이 펼쳐진다.
엉뚱하게도 이런 사고의 흐름은 ‘우주 비행정을 타고 불시착한 잠수부’, ‘어항을 뒤집어쓴 물고기’, ‘양철 쓰레기통 속 문어 괴물 다리’ 등의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끝이 난다. 상념의 파도가 잦아들기 시작하면, 이제 머리 아픈 현실 속 고민은 한편으로 제쳐두고 느닷없이 떠오른 이미지로 나만의 세계를 구상한다.
유희적이고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이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을 만들고 관전하며 당장 해야 할 과제는 잠시 잊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미지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는 낡은 이미지들을 한데 모아 나란히 둔다. 같은 시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또는 동시대에 일어나지 않을 상황을 만화처럼 표현하면서 짤막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제는 바다라 부를 수 없는 곳>은 바다를 찾아왔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주인공들의 이야기이자,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대한 현실의 중압에서부터 도피하고자 만든 가상의 장소이다. 하나둘 만들어진 이야기토막은 크고 작은 부표가 되어 깊은 생각의 바다를 아우른다.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바다라 부를 수 없는 이곳에서 부표를 띄우며 하루를 또 흘려보낸다.